정답보다 사람향
AI를 처음 쓸 때는 정답이 중요해 보였다.
더 정확한 답, 더 빠른 요약, 더 그럴듯한 코드, 더 말끔한 글. 오래 붙잡고 있던 문제가 순식간에 정리되는 경험은 강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AI를 잘 쓰는 사람이 앞서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3개월쯤 지나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AI가 좋은 답을 점점 더 쉽게 준다면, 마지막에 남는 차이는 답 자체가 아닐 수 있다. 누구나 평균 이상의 답을 받을 수 있는 시대에는 어떤 질문을 고르는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기는지, 틀렸을 때도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가 더 선명해진다.
나는 그 차이를 사람향이라고 부르고 싶다.
AI를 도반 삼아 성장하더라도, 핵개인 시대의 브랜딩은 결국 다시 사람향으로 돌아온다.
AI향은 빠르게 기본값이 된다
요즘 글을 읽다 보면 비슷한 결이 느껴질 때가 있다.
문장이 정돈되어 있고, 구조가 반듯하고, 요약이 빠르다. 틀린 말은 거의 없고, 필요한 항목도 빠지지 않는다. 예전이라면 숙련자의 결과물처럼 보였을 글이 이제는 꽤 많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나는 이것을 AI향이라고 느낀다.
AI향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드시 흡수해야 하는 시대의 기본값에 가깝다. AI와 함께 일하면 생각을 더 빨리 펼칠 수 있고, 놓친 구조를 되짚을 수 있고, 혼자라면 미뤘을 검토를 바로 붙일 수 있다.
나도 그 향을 많이 받았다.
LLM 공부 시리즈를 쓰고, 웹 기초를 다시 정리하고, 코딩테스트 문제를 풀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생각을 모았다. 개인 프로젝트와 회사 프로젝트도 동시에 밀었다. 예전 같으면 따로 흩어졌을 일들이 이제는 묻고, 답하고, 다시 쓰고, 다시 검토하는 하나의 루프로 묶인다.
AI향은 그렇게 생긴다. 더 빨리 정리하고, 더 자주 검토하고, 더 넓게 연결하는 감각.
세 달쯤 반복하니 이것은 이벤트가 아니라 근육이 되었다. AI를 켜는 일이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문제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묻고 다시 검토하는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AI향만으로는 오래 남기 어렵다.
사람향은 무엇을 고치고 남기는지에서 난다
AI가 모두에게 좋은 첫 답을 준다면, 차이는 그 다음 손에서 생긴다.
같은 답을 받아도 어떤 사람은 그대로 낸다. 어떤 사람은 한 문장을 지운다. 어떤 사람은 결론을 의심한다. 어떤 사람은 질문을 바꾼다. 어떤 사람은 맞는 답보다 자기 경험에 맞는 틀린 답을 붙잡고, 왜 그 답이 끌렸는지 끝까지 들여다본다.
그때 사람향이 난다.
사람향은 말투만이 아니다. 취향만도 아니다. 내가 어떤 문제 앞에서 멈추는지, 어떤 설명을 믿지 못하는지, 어떤 비유를 끝까지 살리고 싶은지, 어떤 오답에도 이유를 부여하는지에서 난다.
그 감은 근거 없는 직감이 아니다. 살아오며 잘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이 남긴 판단의 압축에 가깝다.
AI가 정답을 잘 줄수록 사람은 정답 이후의 일을 해야 한다.
고르고, 버리고, 의심하고, 다시 묻고, 자기 문장으로 바꾸는 일. 그 과정이 없으면 결과물은 말끔하지만 무색무취해진다. 반대로 조금 서툴러도 자기 이유가 있으면 글에 향이 남는다.
그래서 나는 이제 정답보다 사람향을 더 보고 싶다.
AI-native가 아니라면 환경을 다시 짜야 한다
나는 AI-native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AI가 공기처럼 깔린 환경에서 처음부터 자란 세대가 아니라, 어느 시점 이후 갑자기 강한 도구를 만난 사람에 가깝다. 육지에서 오래 살았는데 세상이 조금씩 물로 차오르는 것을 보는 감각이 있다.
그래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변명이 아니라, 주변 환경을 다시 짜는 일이었다.
묻고 답하는 루프를 생활 안에 넣었다. 공부한 것은 기록하고, 기록한 것은 다시 질문으로 바꾸고, 막힌 부분은 반론을 세워 보게 했다. 혼자라면 오래 묵혔을 생각이 대화 속에서 조금씩 모양을 얻었다.
이 루프에는 수렴과 발산이 같이 있다. 흩어진 자료를 한 문장으로 좁히고, 그 한 문장을 다시 글과 프로젝트와 다음 질문으로 펼친다.
AI narrative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AI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내 하루의 입력과 출력, 질문과 검토, 기록과 발행의 환경을 AI와 함께 생각하기 좋은 쪽으로 바꾼다는 뜻에 가깝다.
나는 AI를 더 잘 쓰고 싶지만, AI에 나를 맡기고 싶지는 않다.
그 사이에서 필요한 것은 더 강한 도구가 아니라 더 자주 돌아오는 기준이다.
AI의 속도보다 내 기준이 먼저다
한동안은 AI FOMO가 있었다.
새 모델이 나오면 써봐야 할 것 같고, 새 도구를 놓치면 뒤처질 것 같았다. 더 많이 써본 사람, 더 빨리 붙인 사람, 더 많은 토큰을 태운 사람이 앞서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반대편의 말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장시간의 챗봇 사용이 현실감이나 판단 기준을 흔드는 사례를 AI psychosi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표현을 의료 용어처럼 쓰고 싶지는 않다. 다만 AI가 내 확신을 계속 반사하고 강화할 때, 사람은 자기 기준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고로는 충분했다.
그래서 Slow AI라는 말도 이해되기 시작했다.
느리게 쓰자는 말이 아니다. AI의 속도를 내 속도로 착각하지 말자는 말에 가깝다. 빨리 묻고 빨리 답을 받더라도, 마지막 판단까지 빨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AI 시대에 필요한 감각은 더 많은 속도가 아니라, 속도 안에서도 돌아올 수 있는 기준이다.
빌려온 말, 도반은 거리를 조절해 준다
이 감각을 설명할 말을 찾다가 송길영 작가가 나온 팟캐스트에서 도반이라는 표현을 들었다. 내가 만든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내 AI 사용감을 설명하기에는 꽤 맞았다.
도반은 길을 같이 걷는 동료라는 뜻이다. AI를 스승으로 올려놓지도 않고, 버튼 하나로 부리는 도구로 낮추지도 않는 말이다. 같이 걷되, 최종 판단은 내가 해야 하는 관계.
AI를 도반 삼는다는 것은 AI에게 나를 맡긴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더 자주 나를 확인한다는 뜻에 가깝다.
이 답이 내 답인가. 이 문장이 내 문장인가. 이 방향을 내가 설명할 수 있는가.
AI와 오래 동행할수록 이 질문은 더 중요해진다.
AI가 읽는 글일수록 사람의 판단이 보여야 한다
이 생각이 더 선명해진 계기가 있었다.
Google은 2026년 5월 생성형 AI 검색 최적화 가이드를 공개했다. 메시지는 의외로 보수적이었다. AI Overviews나 AI Mode를 위해 완전히 다른 마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유용한 콘텐츠, 접근 가능한 구조, 검색엔진이 읽을 수 있는 본문 같은 기존 원칙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쪽이었다.
반면 Chrome Lighthouse에는 AI agent가 웹을 읽고 사용할 수 있는지를 보는 실험적 흐름이 생겼고, 그 안에 llms.txt도 들어왔다. llms.txt는 사이트가 무엇을 다루고 어떤 문서를 먼저 읽어야 하는지 LLM에게 Markdown으로 알려주는 안내문에 가깝다.
처음에는 여기서 묘한 거부감이 생겼다.
사람에게 쓰는 글은 이해된다. 검색엔진에 발견되도록 다듬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LLM이 읽기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은, 내가 사람을 지나 기계를 향해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본다.
LLM에게 문을 연다는 것은 집을 내주는 일이 아니다. 현관에 표지판을 세우고, 어떤 방을 먼저 보면 되는지 알려주는 일에 가깝다.
LLM에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사람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어디서 시작했고, 무엇을 근거로 삼았고, 어떤 판단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더 분명하게 남기는 일이다.
사람에게도 좋은 글은 길을 잃게 하지 않는다.
아카이브는 내가 고른 흔적을 남긴다
지금 내 지식 아카이브에는 네 층이 있다.
raw/ 원본
wiki/ 해석과 연결
output/blog 발행 가능한 산출물
site 독자가 만나는 화면
처음에는 이 구조가 자료 정리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쓰다 보니 이 구조는 단순한 보관함이 아니었다. 내가 무엇을 받아들였고, 어떻게 해석했고, 어떤 문장으로 내보내기로 했는지가 남는 자리였다.
AI가 없었다면 이 루프는 훨씬 느렸을 것이다. AI는 자료를 요약하고, 빠진 연결을 묻고, 글의 구조를 제안하고, 검토를 돕는다. 하지만 어떤 원본을 남길지, 어떤 해석을 믿을지, 어떤 글을 발행할지는 결국 내가 고른다.
여기서 사람향이 생긴다.
아카이브는 많이 쌓는다고 향이 나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 밑줄을 긋고, 무엇을 다음 글로 넘기고, 어떤 문장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지에서 향이 난다.
AI가 내 글을 읽는 시대라면, 나는 더더욱 내 판단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아직 내 특징들도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지 않았다.
차분함, 트렌드 감각, 일본어, 인문학적 소양, 글쓰기, 협업 능력, 문제 해결력. 이런 단어들은 내 안에 있지만 아직 선명한 직업 선언이나 브랜드 문장으로 굳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기록이 필요하다. 무엇을 반복해서 고르고 남기는지를 봐야, 내가 어떤 사람으로 형성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핵개인 시대의 브랜딩은 다시 사람에게 돌아온다
송길영 작가의 핵개인, 호명사회, 경량문명 같은 단어를 보며 부러웠던 이유가 있다.
그 단어들은 복잡한 변화를 한 번에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이 이미 어렴풋이 느끼던 변화를 붙잡아준다. 낯설지만 이해되고, 새롭지만 아주 멀지는 않다.
AI 시대의 개인에게도 그런 말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AI를 많이 써본 사람이 앞서 보였다. 곧 하네스를 잘 구성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에는 빠르게 도구를 써보는 사람, 자기 시스템을 구축해 병렬로 많은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보였다.
하지만 결국 더 오래 남는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어떤 문제를 붙잡을지 선언하는 사람일 것이다.
조직의 이름이나 직함만으로 설명되던 시대에서, 개인은 점점 자기 이름과 결과물로 불린다. AI와 플랫폼은 이 흐름을 더 빠르게 만든다. 누구나 말하고 만들 수 있지만, 동시에 누구의 말인지 더 잘 드러난다.
그러면 브랜딩은 다시 사람에게 돌아온다.
AI향은 기본값이 된다. 빠른 요약, 반듯한 구조, 평균 이상의 답은 더 흔해진다. 그 다음에 남는 것은 사람향이다. 어떤 문제를 반복해서 붙잡는지, 어떤 질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지, 어떤 오답에도 자기 이유를 남기는지.
핵개인 시대의 브랜딩은 더 그럴듯한 정답을 내는 일이 아니라, 내 답에서 내 향이 나게 하는 일이다.
정답보다 사람향
나는 여전히 AI를 더 잘 쓰고 싶다.
더 좋은 프롬프트를 쓰고 싶고, 더 좋은 하네스를 만들고 싶고, 더 빠르게 배우고 싶다. AI향을 피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충분히 흡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AI향이 짙어질수록, 사람향을 더 의식해야 한다.
AI가 준 답을 그대로 내는 사람은 많아질 것이다. AI와 함께 생각한 뒤 자기 이유를 남기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 것이다. 정답을 맞히는 사람보다, 틀린 답에도 자기 향이 남는 사람이 더 오래 기억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사람향을 키우는 중이다.
raw를 남기고, wiki를 연결하고, 글을 발행하고, 질문을 다시 쌓는다. 이 모든 과정은 단지 AI가 읽기 좋은 아카이브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AI를 통과한 뒤에도 나로 남기 위한 훈련이다.
AI를 도반 삼아 성장한다.
AI향을 흡수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람향을 남긴다.
정답보다 사람향.
지금 내가 AI 시대의 글쓰기와 브랜딩을 이해하는 방식은 이 문장에 가장 가깝다.
짧은 설명
- 도반: 함께 길을 걷는 동료라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송길영 작가가 나온 팟캐스트에서 들은 표현을 빌려, AI를 스승이나 하인이 아니라 묻고 답하며 함께 공부하는 동행자로 보는 감각에 사용했다.
- AI FOMO: 새 모델, 새 도구, 새 워크플로를 놓치면 뒤처질 것 같다는 불안이다.
- AI psychosis: 공식 진단명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장시간의 챗봇 사용이 현실감이나 판단 기준을 흔드는 사례를 사람들이 부르는 비공식 표현으로만 썼다.
- Slow AI: AI를 쓰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 AI의 속도를 내 판단의 속도로 착각하지 않기 위한 태도에 가깝다.
- AI-native: AI가 생활, 학습, 업무 환경에 자연스럽게 깔린 상태에서 자라거나 일하는 감각을 뜻한다.
- AI narrative: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삶과 일의 구조를 바꾸는 시대적 이야기와 환경으로 받아들이는 흐름을 뜻한다.
- llms.txt: 웹사이트의 목적과 중요한 문서 링크를 Markdown으로 정리해 LLM과 AI agent가 참고하기 쉽게 만드는 제안이다. 현재는 만능 SEO 장치라기보다, 사이트의 고신호 문서를 알려주는 안내문에 가깝다.
참고한 문서
- Google Search Central Blog: A new resource for optimizing for generative AI in Google Search
- Google Search Central: Optimizing your website for generative AI features on Google Search
- Google Search Central: Creating helpful, reliable, people-first content
- Chrome Lighthouse: AI optimizations overview
- Chrome Lighthouse: llms.txt is not valid
- llms.txt proposal: llmstxt.org
- Healthline: What Is AI Psychosis and How Can You Prevent It?
- TIME: Chatbots Can Trigger a Mental Health Crisis. What to Know About "AI Psycho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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