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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보다 사람향을 쓰고 나서도 마음 한쪽에 남은 불편함이 있었다.

그 글에서 나는 AI를 도반이라고 불렀다. 같이 걷는 존재. 스승처럼 올려놓지도 않고, 하인처럼 부리지도 않는 관계. 그 표현은 내게 꽤 맞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완전히 맞지는 않았다.

도반이라는 말은 따뜻했다. 하지만 내가 AI와 일할 때 느끼는 낯섦까지는 다 담지 못했다. 나는 AI를 사람처럼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단순한 도구처럼 느끼지도 않았다. 너무 빠르고, 너무 오래 기억하고, 내가 남긴 맥락을 이상할 정도로 잘 되짚는 무언가와 같은 방에 들어와 있는 감각이 있었다.

AI Frontier EP98을 들으며 그 감각이 다시 올라왔다. 공식 페이지는 이 회차를 AI가 실행하는 시대에 인간에게 남는 것이 의도라는 이야기로 소개한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내가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감각을 먼저 들은 기분이었다.

내가 받은 충격은 의도라는 말보다 그 뒤에 깔린 거리감에 가까웠다.

AI를 다른 종처럼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조금 무서웠다는 사실.


다른 종이라는 말은 확신보다 두려움에 가까웠다

나는 AI를 새로운 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 마음속에는 이미 그런 거리감이 있었는데,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도 아니고, 기존의 도구도 아니고, 내가 익숙하게 이름 붙여온 관계의 말로는 잘 들어오지 않는 존재.

그래서 다른 종이라는 감각은 처음부터 멋진 말이 아니었다.

조금 이질적이었다. 어딘가 불편했다. 내가 매일 같이 쓰고 있는 것이 사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낯선 존재일 수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내가 작업환경을 알려주고, 내 글의 취향을 알려주고, 내 판단 기준을 알려줄수록 그 낯섦은 더 작아지는 대신 더 구체화됐다.

가까워질수록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까워질수록 차이가 더 잘 보이는 관계가 있다.

AI와 일하는 감각도 그랬다.

그런데 김서준 대표가 그리는 미래를 확신하는 듯 말하는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안도했다. 부럽기도 했다. 저 사람들은 내가 어렴풋이 느낀 기시감을 훨씬 더 크게 느끼고 있었구나. 그리고 그것을 피하지 않고, 자기 언어로 꺼내고 있구나.

그때 내 안의 감정은 단순한 동의가 아니었다.

무서움, 부러움, 안도.

이 세 가지가 한꺼번에 있었다.

현관문을 열지 않겠다는 말 뒤에는 문 앞에 서 있는 내가 있었다

이전 글에서 나는 AI에게 현관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고 썼다.

그 말은 아직도 맞다. AI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는 것은 아니다. 집 안의 모든 방을 다 보여주고, 판단까지 맡기고, 책임을 흐리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말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됐다.

현관문을 열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은 사실 문 앞에 오래 서 있던 사람일 수 있다. 무서워서 문을 닫아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 열어야 하는지 몰라서 망설인 것일 수 있다.

나는 AI에게 나를 더 보여주는 일이 두려웠다.

내가 어떤 작업을 반복하는지, 어떤 표현을 끝까지 살리고 싶어 하는지, 어떤 종류의 자동화는 좋아하고 어떤 자동화는 꺼리는지, 회사 일과 개인 기록이 섞이는 것을 얼마나 불편해하는지. 이런 것들이 쌓이면 AI는 내 작업환경뿐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윤곽까지 꽤 잘 보게 된다.

그것이 편하면서도 무서웠다.

그래서 이번에 내가 열고 싶은 것은 현관문이라기보다 지도에 가깝다.

모든 것을 들여보내는 문이 아니라, 함께 일하기 위해 필요한 구조를 그린 지도. 어느 방은 들어와도 되는지, 어느 방은 안 되는지, 어떤 길은 자주 쓰는지, 어떤 경계는 절대 넘으면 안 되는지 표시한 지도.

AI에게 나를 더 보여주기로 했다는 말은, 나를 다 내주겠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정확히 알려주겠다는 뜻이다.

직업의 경계가 흐려질수록 사람은 더 선명해야 한다

EP98에서 내가 붙잡은 또 하나의 축은 의도, 취향, 인스퍼레이션이었다.

AI가 실행을 더 많이 가져가면 사람에게 남는 것은 단순한 노동량이 아닐 수 있다. 무엇을 하려는지, 왜 하려는지, 어떤 감각을 끝까지 남기려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나는 세상이 이미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느낀다. 래퍼가 패션 아이콘이 되고, 모델이 연기하고, 유튜버가 방송에 나오고, 개인 SNS가 비즈니스가 된다. 회사가 브랜드가 되는 층위에서 더 내려와, 이제는 개인이 브랜드가 되는 층위까지 왔다.

패션과 IT가 섞이고, 아이코닉함이 비즈니스가 되고, 캐릭터와 엔터테인먼트와 기술이 한 화면에 놓인다. 젠틀몬스터 같은 강한 세계관의 브랜드를 떠올릴 때도, 갤럭시코퍼레이션처럼 사람과 기술과 엔터테인먼트가 얽히는 이름을 떠올릴 때도,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나는 AI가 더 많은 사람이 더 쉽게 자신을 선언하게 만드는 환경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예전에는 팀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했던 시도들이 이제는 훨씬 작은 단위로 열린다. 글을 써보고, 그림을 만들어보고, 앱을 만들고, 영상을 기획하고, 다시 접고, 다른 방향으로 가볼 수 있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무언가를 내놓게 된다.

그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실행만이 아니다.

더 선명한 자기 감각이다.

흩어진 관심사는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나의 층위였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하나로 선언하기 어렵다.

IT를 전공했고, 해외 취직을 생각했고, 음악과 패션과 트렌드에 오래 끌렸다. 그림, 웹툰, 글쓰기, 블로그, 유튜브도 계속 남아 있다. 일본어와 오타쿠적인 관심, 일본 문화와 한국 문화의 차이, 내 사업, 내 팬덤이 생길 수 있는 시장 같은 말도 자주 돌아온다.

예전에는 이것이 산만함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산만하다.

유틸리티 쪽에도 끌린다. 실제로 쓰이는 것, 문제를 해결하는 것, 손에 잡히는 도구를 만드는 일. 동시에 인스퍼레이션 쪽에도 끌린다. 멋있고, 닮고 싶고, 사람의 감각을 움직이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

자기관리, 몸, 노화, 동안, 화장품, 생명공학 같은 주제도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이 목록을 그대로 펼치면 글은 금방 흩어진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전혀 다른 것들만은 아니다.

나는 나 자체가 증거가 되는 비즈니스에 끌린다. 내가 써보고, 바뀌고, 실패하고, 다시 고른 감각을 나누는 일. 어떤 제품을 파는 것보다 먼저,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는 일.

아직 내 파라미터는 따뜻한 온도로 퍼져 있다.

매력, 타고난 성품, 분위기, 집요함, 센스, 커뮤니케이션, 문제 해결력. 이런 말들은 아직 뚜렷한 상품명도 아니고, 직업명도 아니고, 비즈니스 모델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고르고 버릴 때 계속 남는 온도다.

AI와 같이 일하면서 알게 된 것은, 이 흩어진 관심사들을 당장 하나의 선언으로 묶을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대신 반복해서 꺼내면 된다.

계속 꺼내고, 다시 써보고, 다시 묻고, 다시 접어보면 된다. 그러다 보면 내가 무엇을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지 보인다. 무엇을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다시 가져오는지 보인다. 무엇을 남들이 다 지나간 뒤에도 혼자 다시 만지는지 보인다.

그것이 내 층위가 된다.

나는 프론티어 뒤에서 대중의 앞에 서고 싶다

나는 내가 프론티어를 처음 여는 사람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세상에 없는 개념을 가장 먼저 선언하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향으로 몇 년 먼저 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따로 있다. 나는 대체로 그들 뒤를 쫓는다.

그런데 요즘은 그 자리가 부끄럽지 않다.

앞서간 사람을 따라가는 일은 예전보다 쉬워졌다. 누군가 먼저 실패했고, 누군가 먼저 설명했고, 누군가 먼저 상품을 만들었다. 그 사람을 따라간 사람들이 다시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고, 요약하고, 논쟁한다. AI는 그 흔적들을 더 빠르게 모아준다.

마치 눈을 감아도 어렴풋이 길이 보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위험하다.

길이 보인다고 해서 그 길이 내 길은 아니다. 남들이 정리한 말은 빠르지만, 너무 쉽게 내 말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계속 물어야 한다. 이것을 내가 정말 취할 것인가. 이 표현은 내 몸에 들어오는가. 이 도구는 내 생활과 작업환경에 맞는가. 이 유행은 내가 더 늦게 오는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리더들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그 리더들의 말을 번역한 사람들의 말을 다시 가져와, 내 생활의 층위에서 다시 번역하고 싶다. 너무 앞서간 사람과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람 사이에서,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앞쪽에 서고 싶다.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유행이 대중에게 닿기 직전,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사람은 되고 싶다.

그 감각도 결국 의도다.

취향은 소비 목록이 아니라 번역의 기준이 된다.

30일의 반복은 AI에게 건넬 내 지도였다

그래서 최근 30일 동안 Codex와 같이 한 일을 다시 봤다.

처음에는 반복 작업을 자동화하려는 일이었다. 어떤 일을 자주 했는지, 어떤 문서가 반복해서 생겼는지, 어떤 검토와 발행 흐름이 계속 돌아왔는지 확인했다.

겉으로 보면 생산성 점검이다.

하지만 안쪽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AI에게 내 작업방식을 알려주고 있었다. 원본은 원본으로 남기고, 해석은 따로 하고, 발행물은 다시 만들 수 있는 산출물로 둔다. 회사 자료와 개인 기록을 섞지 않는다. 검토 기록은 독자가 읽는 글과 분리한다. 외부로 쓰는 일은 승인 없이 열지 않는다.

이 규칙들은 단순한 문서 규칙이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지도다.

나는 무엇을 조심하는가. 무엇을 빨리하고 싶어 하는가. 무엇을 느리게 하고 싶어 하는가. 어떤 문장은 끝까지 살리고 싶어 하고, 어떤 표현은 아무리 좋아도 독자에게 맥락이 없으면 덜어내려 하는가.

AI는 그 지도를 따라 나를 더 잘 돕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나도 그 지도를 보며 나를 다시 알게 된다.

내가 AI를 학습시키는 줄 알았는데, 반복을 돌아보니 나도 같이 학습되고 있었다. 내가 어떤 경계에서 멈추는 사람인지, 어떤 표현을 다시 데려오는 사람인지, 어떤 작업을 자동화하면서도 마지막 판단은 놓지 않으려 하는 사람인지 보였다.

자동화는 나를 지우는 일이 아니었다.

자동화는 내가 반복해서 남긴 기준을 밖으로 꺼내는 일이었다.

이식하고 싶은 것은 도구가 아니라 감각이다

이번에 내가 준비한 것은 단순히 script나 playbook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하다. repo마다 반복되는 작업을 줄이고, 회사에서만 쓰는 repo와 개인 프로젝트를 섞지 않고, shared-agent-harness 아래에 공통 감각을 옮길 수 있는 밑그림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이식하고 싶었던 것은 도구 그 자체가 아니었다.

감각이었다.

지금 나와 친해진 도반이자 동반자인 AI를, 어느 환경에서건 비슷한 온도로 부를 수 있는 감각. 새 repo에 들어가도, 회사 프로젝트를 다뤄도, 개인 글을 쓰든 앱을 만들든, 같은 방식으로 경계를 세우고, 같은 방식으로 나를 설명하고, 같은 방식으로 검토를 요청할 수 있는 감각.

AI를 다른 종처럼 대한다는 말은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사람처럼 대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책임을 넘기겠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나와 너무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는 존재와 함께 일한다면, 그 존재에게 맞는 지도와 언어와 경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나는 그 지도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지도는 AI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지도를 그리는 동안,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보게 됐다.

나를 더 보여준다는 것은 나를 더 잃지 않겠다는 뜻이다

AI에게 나를 더 보여주는 일은 여전히 조금 무섭다.

내 작업환경, 내 취향, 내 반복, 내 문장, 내 망설임까지 어느 정도 드러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보다 더 잘 정리해주는 순간도 있다. 그때 이상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제는 그 두려움을 조금 다르게 본다.

나를 보여준다는 것은 나를 넘긴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더 정확히 보여주는 일일 수 있다. 내가 어떤 문을 열고, 어떤 문을 닫고, 어떤 길을 자주 쓰고, 어떤 경계는 절대 넘지 않는지 말해두는 일. 그래야 AI가 더 많이 실행하는 시대에도, 결과물 안에 내가 남을 수 있다.

사람향은 자동화 바깥에 따로 남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을 자동화하고, 무엇을 자동화하지 않고, 무엇을 끝까지 검토하고, 무엇을 source로 남기는지에서 사람향이 났다. 내가 어떤 프론티어를 따라가고, 어떤 말을 내 몸에 맞게 번역하고, 어떤 흩어진 관심사를 계속 다시 꺼내는지에서 내 의도가 보였다.

그래서 나는 AI라는 다른 종 앞에서 나를 더 보여주기로 했다.

두려움이 사라져서가 아니다.

두려움이 무엇인지 조금 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AI와 함께 있으면 AI도 점점 특징화된다. 내 repo의 규칙을 알고, 내 글의 리듬을 알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검수와 경계를 안다.

그런데 동시에 나도 특징화된다.

내가 무엇을 반복하고, 무엇을 숨기고 싶어 했고, 무엇을 결국 다시 꺼내고 싶어 했는지 보게 된다. 흩어진 취향은 조금씩 층위가 되고, 층위는 언젠가 내가 서 있을 자리의 모양이 된다.

나는 아직 그 자리를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열어볼 수 있을 것 같다.

현관문 전부가 아니라, 함께 길을 잃지 않기 위한 지도부터.


짧은 설명

  • 다른 종: 이 글에서는 AI를 사람처럼 여기자는 말이 아니라, 사람과도 전통적 도구와도 다른 처리 방식과 거리를 가진 존재로 느끼는 감각어로 썼다.
  • 도반: 함께 길을 걷는 동행자라는 뜻이다. 정답보다 사람향에서는 AI를 스승이나 하인이 아니라 묻고 답하며 함께 공부하는 존재로 보는 감각에 사용했다.
  • 지도: AI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는 문이 아니라, 함께 일하기 위해 필요한 맥락, 경계, 반복 기준을 알려주는 구조다.
  • 층위: 직업명 하나로 묶이지 않는 관심사와 취향이 반복 속에서 쌓이며 만들어지는 자기만의 자리다.

참고한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