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레이어를 이해할 수 없게 된 뒤에
요즘 AI 뉴스를 정리하다 보면 메모 한 줄이 금세 한 페이지가 된다.
compute, data, algorithm을 적는다. 그 아래에는 chip과 데이터센터, 전력과 냉각, 학습과 추론을 효율화하는 software orchestration이 붙는다. 모델 위로 올라가면 post-training과 RLVR, agent와 application이 기다린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physical AI, biology, chemistry, physics가 나타난다.
하나를 이해하려고 시작했는데 전체 산업의 층이 한꺼번에 펼쳐진다.
예전에는 몰라서 불안했다. 지금은 너무 많은 것이 보여서 불안하다.
정말 앞서가려면 칩부터 하드웨어, 랙, LLM,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까지 모두 알아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스무 살을 갓 넘긴 창업자가 회사를 만들고, 누군가는 대학을 떠나 Y Combinator로 향한다. 그 장면들을 오래 보고 있으면 프론티어의 속도가 어느 순간 나의 부족함을 재는 자처럼 변한다.
나는 어디까지 알아야 하는가.
그리고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면, 나에게 남는 일은 무엇인가.
프론티어를 따라갈수록 내가 느려졌다
AI Frontier EP102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프론티어 랩 출신 창업자, 스타트업, VC의 분위기를 하나의 현장 지도처럼 보여준다.
그 지도에서 투자자의 관심은 모델을 사용한 애플리케이션만 향하지 않았다. 데이터센터, 전력, 냉각, 칩, 학습과 추론을 효율화하는 오케스트레이션 소프트웨어가 뜨거웠다.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는 칩 생태계로 먼저 읽혔다. 프론티어 랩 안에서는 포스트트레이닝에 사용할 고품질 데이터와 평가 문제를 만드는 일이 계속 중요해지고 있었다.
동시에 시간 격차와 도메인 격차는 압축되고 있었다.
코딩이나 수학처럼 디지털 환경에서 결과를 검증하기 쉬운 영역은 프론티어 모델 안으로 빠르게 흡수된다. 물리 환경이나 생물학처럼 보상 신호를 만들기 어려운 영역에서는 프론티어 랩의 방식을 각 도메인에 다시 세우려는 회사가 생긴다. B2B와 B2C의 응용 가능성도 아직 넓게 남아 있다.
이 지도는 흥미로웠지만 동시에 막막했다.
어느 한 곳만 봐서는 전체를 놓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모든 층을 직접 파고들면, 하나를 이해하는 동안 산업의 지도가 다시 바뀔 것 같았다. 내게는 빅테크의 결과물이 더 빠르게 도착할수록 그 결과에 이르는 판단과 시행착오가 공개 자료만으로는 더 잘 보이지 않는 듯했다. 발표를 이해했다고 생각한 다음 날 더 새로운 결과가 나타났다.
관심을 갖고 따라가는 사람과 멈춰 있는 사람의 격차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가는 사람 안에서도 읽은 정보와 실제 이해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지식보다 경계를 연결하는 능력이 비싸지고 있었다
EP102에서 가장 오래 남은 대목은 최고급 포스트트레이닝 데이터가 만들어지는 방식이었다.
프론티어 랩이 원하는 것은 인터넷에 이미 많이 쌓인 일반 지식만이 아니었다. 전문가가 오랜 경험으로 구분해온 좋은 답과 나쁜 답, 실패하기 쉬운 조건, 결과를 판정할 수 있는 문제였다.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던 암묵지를 연습 문제와 평가 기준으로 바꾸는 일이 모델의 새로운 능력을 만들고 있었다.
대학 행정 시스템을 예로 들면 이 차이가 더 선명해진다.
입학 업무에서는 특정 시기에 특정 입시 연도와 모집 구분을 중심으로 여러 화면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반면 재무 업무에서는 3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이어지는 회계연도에 맞춰 예산 데이터를 불러오고, 연도가 바뀌면 관련 데이터를 다시 읽어야 한다.
화면에는 같은 연도처럼 보여도 업무가 사용하는 시간축과 데이터의 의미는 다르다.
좋은 전산시스템은 이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부서별 업무 특성에 맞게 유연하게 반영한다. 그러려면 코드를 작성하기 전에 어떤 값이 업무의 기준이며, 언제 바뀌고, 무엇을 함께 다시 불러와야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런 지식은 일반적인 개발 문법만으로 얻기 어렵다. 현업과 대화하고, 예외를 처리하고, 변경의 영향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쌓인다. AI 시대에는 이 암묵지가 요구사항과 데이터 정의, 테스트 시나리오와 평가 기준으로 바뀔 수 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육각형 인재라는 말을 다르게 보게 됐다.
앞서가는 사람들이 칩부터 애플리케이션까지 이야기한다고 해서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컴퓨트의 제약이 모델과 제품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데이터와 평가 기준이 포스트트레이닝을 어떻게 바꾸는지, 기술적 선택이 비용과 고객 경험에 어떻게 이어지는지 연결해서 본다.
종합예술의 핵심은 지식의 총량보다 레이어 사이의 관계를 읽는 능력에 가까웠다.
한 분야를 깊게 아는 것만으로는 전체 시스템의 방향을 정하기 어렵다. 반대로 모든 분야를 얕게 훑기만 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책임 있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넓은 폭은 문제 전체를 보게 하고, 깊은 축은 중요한 결정을 검증하게 한다.
육각형과 T자형은 서로 반대되는 목표가 아니었다.
육각형은 여러 분야의 사람과 협업할 수 있는 기본 폭이고, T자의 세로축은 결과를 책임질 수 있을 만큼 깊게 파고든 전문성이다.
이해하지 못한 산출물이 먼저 도착했다
EP103에서는 더 직접적인 장면이 나온다.
강한 모델이 짧은 시간에 많은 코드를 검토하고, 이전 모델들이 찾지 못한 문제를 찾아낸다. 그런데 사람이 그 결과를 읽고 정말 맞는지 확인하는 속도는 모델의 생성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일은 진행됐지만 작업한 사람의 머릿속에는 설명되지 않은 결정이 남는다.
인지 부채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자주 한다. AI가 문서와 코드를 만들고, 여러 관점의 리뷰를 한꺼번에 내놓는다. 산출물의 양만 보면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결과를 내 언어로 설명하지 못하면, 실제로는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다음 문제가 생겼을 때 어디서부터 의심해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요약은 충분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요약은 읽을 양을 줄여주지만, 내가 문제 공간을 통과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해에는 마찰이 필요하다. 구현 전에 무엇을 모르는지 묻고, 진행 중에 왜 그 결정을 했는지 기록하고, 구현 후에 내 설명으로 다시 써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AI에게 질문을 만들게 하고 내가 답해보는 일도 도움이 된다.
글쓰기는 이 과정에서 가장 느린 도구였다.
그리고 그래서 필요했다.
모든 토끼굴에 들어가는 것은 책임이 아니었다
이해가 중요하다는 말은 쉽게 다른 강박으로 이어진다.
직접 이해하지 않은 것은 믿지 말아야 한다. 코드를 맡겼다면 모든 줄을 읽어야 한다. 모델을 쓴다면 학습 구조부터 인프라까지 알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결국 다시 모든 레이어를 파고들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돌아간다.
EP103은 여기서 한 번 더 방향을 튼다.
새로운 세대는 이전 세대가 직접 다뤘던 하위 기술을 추상화 아래에 묻고 한 단계 높은 곳에서 일해왔다. 지금의 코드와 프레임워크 일부도 언젠가는 같은 자리에 놓일 수 있다. 그렇다면 엔지니어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위치가 바뀐다.
무엇을 목표로 둘 것인가.
어떤 문제를 사람에게 남길 것인가.
어떤 모델과 도구에 실행을 맡길 것인가.
어디서 결과를 검증하고 멈출 것인가.
이제 더 중요한 능력은 모든 토끼굴에 들어가는 성실함이 아니라, 어느 토끼굴에 들어가야 하는지 판단하는 경험일 수 있다.
하위 구현을 더 알아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 레이어는 묻고 지나갈 수 있다. 반대로 데이터 권한, 공식 원본, 오류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합격과 실패를 나누는 기준은 직접 이해해야 한다. 모르는 것을 감추는 일과 의도적으로 추상화하는 일은 다르다. 후자는 어디까지 위임했으며 어느 지점에서 다시 검증할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쌓아야 할 지식의 양보다, 지식의 깊이를 선택하는 기준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직군의 경계보다 문제의 전체가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AI가 구현의 많은 부분을 맡기 시작하면 개발자, 기획자, 운영자, 데이터 담당자의 경계도 지금과 같게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개발자는 코드를 작성하는 능력만으로 자신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어떤 요구를 받아들일지 판단하고, 시스템 구조와 데이터 흐름을 설계하고, 보안과 운영 위험을 확인하고, 비용과 일정을 고려해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기획자도 기술이 실제로 가능한 범위와 검증 방법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이 변화에 대비해 여섯 개의 축을 갖추고 싶다.
- 소프트웨어와 시스템 구조
- 데이터와 AI 평가
- 인프라와 보안
- 문제 정의와 업무 및 고객 이해
- 기획과 문서 및 실행 관리
- 커뮤니케이션과 PT 및 가치 설명
여섯 축을 모두 같은 깊이로 공부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각 분야의 언어를 이해하고, 담당자와 질문을 주고받고, 결과가 타당한지 확인할 수 있는 기본 폭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그 위에서 복잡한 전산시스템의 구조를 분석하고, 요구사항을 설계하며, 구현 결과를 검증하는 능력을 나의 깊은 축으로 키우고 싶다.
채용공고는 이미 문제를 끝까지 푸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AX 인재 전쟁이라는 말을 국내 채용 플랫폼과 실제 공고에 대입해보면, 기업이 찾는 사람의 모습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원티드의 2026 AX 인사이트 리포트는 AI를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일하는 방식, 인재 기준, 조직 구조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원티드 AX가 내세우는 현업 주도 전환도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보다 실제 업무 문제를 발견하고 AI 도구로 바꿔 운영할 수 있는 사람에 무게를 둔다.
현재 공개된 AX와 AI 직무 공고에서는 이 요구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어떤 회사는 사용자 관점에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기존 업무 프로세스를 재설계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다른 회사는 복잡한 업무 문제를 구조화하고 문제 정의부터 프로토타입과 딜리버리까지 이끌 오너십을 요구한다. AI 기능의 기획, 구현, 배포를 함께 맡거나 서비스 조직과 요구사항 및 우선순위를 조율하는 역할도 등장한다.
AI의 답변 품질을 정확도, 일관성, 지연시간, 비용으로 측정하고 정답 없는 문제를 정량화하는 능력도 요구된다. AI 활용 코딩 테스트에서는 AI 없이 얼마나 빨리 코드를 작성하는가보다 AI가 만든 코드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를 보려는 변화가 소개된다.
공통점은 기술 하나가 아니다.
문제를 발견하고, 업무와 고객의 맥락을 이해하고, 구조화하고, 적합한 기술을 선택하고, 구현하고, 지표로 검증하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실제 변화까지 만들어내는 전 과정이다.
이것이 내가 준비해야 할 AX 시대의 문제해결력이다.
육각형의 여섯 축은 각각 떨어진 자격 목록이 아니다. 그 가운데에는 문제해결력이 있고, 여섯 역량은 하나의 문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풀기 위해 연결된다.
깊이는 호기심보다 결과에 미치는 영향으로 정해야 했다
공부할 것이 많아질수록 무엇을 공부할지보다 어디까지 공부할지를 정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결과가 틀렸을 때 내가 책임져야 하는가.
다른 사람이나 AI가 만든 결과를 독립적으로 검증해야 하는가.
여러 프로젝트에서 반복해서 사용할 지식인가.
한번 잘못 정하면 나중에 되돌리기 어려운 결정인가.
이 질문에 해당한다면 하위 원리와 실패 방식까지 깊게 들어가야 한다. 시스템 구조, 데이터 흐름, 보안, 핵심 업무 규칙, 평가 기준처럼 결과의 신뢰를 좌우하는 영역이 여기에 들어간다.
협업을 위해 필요한 분야라면 입력과 출력, 주요 제약, 실패 신호, 담당자에게 물어야 할 질문까지 이해한다. 지금 당장 내 결과를 바꾸지 않는 프론티어 기술은 전체 지도에서 위치와 가능성을 파악하는 수준으로 남겨둘 수 있다.
모든 토끼굴에 들어가지 않는 대신, 들어가지 않은 이유와 다시 들어가야 할 조건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판단 기준이 있어야 T자의 가로축이 끝없는 교양 공부가 되지 않고, 세로축도 시대와 동떨어진 고집이 되지 않는다.
글은 기술을 사업의 언어로 바꾸는 훈련이 되었다
이제 프론티어를 따라가는 방법도 바꾸고 싶다.
모든 뉴스를 같은 깊이로 공부하지 않는다. 칩과 컴퓨트, 데이터, 알고리즘, AI for Science의 큰 흐름은 지도로 유지한다. 무엇이 바뀌고 있으며 전산시스템의 각 레이어와 만나는 지점이 어디인지 볼 수 있을 정도로 따라간다.
대신 내가 깊게 공부하기로 한 영역에서는 작은 실험과 검증을 반복한다. AI 오케스트레이션과 평가를 활용하되, 중요한 판단을 모델의 출력 안에 묻어두지 않는다.
이 폭과 깊이를 연결하는 방법이 글이다.
프론티어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쓴다. 그것이 실제 시스템에서 어떤 질문으로 바뀌는지 쓴다. 작은 실험으로 무엇을 확인했는지 쓴다. 어디까지 이해했고 무엇을 의도적으로 하위 레이어에 묻었는지 쓴다.
글은 기술 공부의 결과만 남기지 않는다. 요구사항 정의서와 계획서에서는 문제를 구조화하는 능력이 드러난다. 보고서에서는 근거와 위험을 구분해야 한다. 제안서에서는 기술이 만드는 가치를 설명해야 한다. PT에서는 복잡한 판단을 다른 사람이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언어로 바꿔야 한다.
사업가적인 역량도 여기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회사를 창업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해결할 문제를 고르고, 필요한 사람과 자원을 모으고, 기술의 가치를 설명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능력이다. 문서 작성과 커뮤니케이션, PT는 기술 바깥의 부가 능력이 아니라 기술을 실제 변화로 연결하는 마지막 레이어다.
글은 결과를 자랑하기 위한 마지막 포장이 아니다.
AI의 속도와 나의 이해 사이에 놓는 검문소다.
나는 T자형 육각형 인재를 향해 가기로 했다
나는 모든 레이어를 아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어쩌면 그런 사람은 이제 누구도 될 수 없을지 모른다. 하루가 다르게 쌓이는 칩, 인프라, 모델, 데이터, 과학, 애플리케이션의 깊이를 한 사람이 모두 감당하기에는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래서 따라잡는다는 말의 뜻을 바꾸기로 했다.
모든 지식을 머릿속에 넣는 것이 아니라, 여러 레이어의 언어를 연결할 수 있는 폭을 갖추는 것. 어떤 지식이 지금의 결정에 필요한지 고르고,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영역은 하위 원리까지 깊게 들어가는 것. 기술적 판단을 문서와 말로 설명해 다른 사람의 결정과 실행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앞서가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종합예술도 결국 이 능력에 가까워 보인다.
칩부터 애플리케이션까지 모든 것을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 레이어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고 어디에 자원과 시간을 써야 하는지 판단한다. 기술과 제품, 사람과 시장을 하나의 문제 안에서 다룬다.
사람의 이해가 병목이 되고 직군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에는 직함보다 어떤 문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지가 중요해질 것이다.
나는 단순히 코드를 잘 작성하는 사람보다 복잡한 전산시스템을 전체로 보고, 필요한 곳에서는 깊이 들어가며, 그 판단을 문서와 커뮤니케이션으로 다른 사람의 실행까지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을 중심에 두고 그 폭과 깊이를 계속 점검하려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T자형 육각형 인재이고, 앞으로 준비할 나의 종합예술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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